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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 앨범/ ♣ 대 구 지역

달성군 강정보 녹색길 따라 문양역에서 강정보까지 걸어보기

 

 

 

*****산 행 개 요****

 

▩산  행  지 : 강정보 녹색길 (구봉산, 190.5m)

▩일       시 : 2013. 04. 26(금)

▩산행 코스 : 문양역(07:16) - 마천산안내도(07:26) - 능선갈림길(07:31) - 송전탑(07:47) - 좌갈림봉(07:59) - 녹색길분기봉(08:08) - 감문지(08:27) - 하빈교(08:48) - 묘2리표석(09:01) - 육신사삼거리(09:09) - 녹색길시점(09:24) - 육신사(09:47) - 안부네거리(09:53) - 육각정(10:01) - 낙빈서원(10:16) - 삼가헌(10:19) - 지하통로(10:39) - 토석채취장(10:50) - 운동시설(10:57) - 구봉산전망대(11:11) - 중식(11:16~11:29) - 하목정(11:42) - 성주대교하단(11:49) - 연빛마을쉼터(12:06) - 봉촌나루터전망대(12:25) - 하빈배수펌프장(12:44) - 문산취수장(13:05) - 영벽정(13:30) - 매곡취수장(13:56) - 녹색길갈림길(14:16) - 강정대(14:30) - 정상갈림길(14:37) - 강정마을(14:48)

▩산행 거리 : L= 약27.86km (수평거리: L=26.04km)

▩산행 시간 : 산행 7시간 32분(산행 평균속도 : 3.55km/h)

▩참  가  비 : 나홀로 지하철 이용

▩준  비  물 : 중식, 간식, 식수, 썬그라스, 보온쟈켓, 우의, 카메라, 기타 개인장구.

▩출  발  지 : 06시 20분 ( 성서 우리집 )

▩산행 종류 : 횡단형 산행

▩산행 날씨 : 봄바람이 심하게 불고 가끔 빗방울 떨어지는 날씨

▩산의 개요 :

 

**육신사와 묘골 마을

묘골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사육신을 배향한 육신사와 얼마 전 개관한 기념관이 있으며 특별히 귀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보물로는 태고정이 있고,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도곡재와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삼가헌 등 많은 건축물과 유물이 남아있다.

특히 묘골이 충절의 고향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것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일족이 큰 화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보여 온 삶이 충(忠)과 효(孝)를 실천하며 살아온 것 때문이라 하며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사람인 취금헌(醉琴軒)박팽년(朴彭年)선생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영남의 대표적 양반마을 묘골이다.

박팽년 선생은 본관은 순천이고 자는 인수(仁搜) 호는 취금헌이다.1417년에 태어나 18세 때인 세종16년(14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輯賢殿學士)가 되어 성삼문등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여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참가 하였다. 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문종을 보필하였고 문종이 재위2년 만에 운명을 달리할 때 역시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 외직에 있는 동안 수양대군(首陽大君, 世祖)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안평대군(安平大君-세종의 셋째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簒奪)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고, 그 후 형조참판(법무부차관)으로 제수되어 내직으로 들어온 박팽년을 비롯하여 사육신중 다른 다섯 분(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등과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함께 모의했던 김질(金瓆)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밀고, 결국 세상에 밝혀져 단종복위가 실패로 돌아가고 모두 체포, 투옥되는데, 평소 그의 재주를 아끼던 세조가 김질을 옥중에 보내어 모의사실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회유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마지못한 세조가 친국(親鞫)을 하게 되는데 자신을 상감이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대답을 하니 세조가 노하여 네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칭하였거늘 "이제 와서 나를 상감이라 하지 않느냐?" 고 하자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충청관찰사로 있을 때에 올린 장계(狀啓:외직에 있는 관원이 왕에게 올리던 글)에 신(臣)자를 써야 할 곳에 거(巨)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더욱 노한 세조는 그러면"내가 주는 녹봉(祿俸)은 받지 않았느냐?"고 하자 한 톨의 곡식도 받지 않았다고 하여 확인해 보니 충청감영 창고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이에 더욱 노한 세조의 혹독한 고문으로 8일 만에 옥중에서 순절(殉節)하였고 이조판서로 있던 그의 부친(박중림)과 부친의 4형제, 그의 아들 삼형제등 3대에 걸쳐9명이 처형되었으며 다른 다섯 분의 사육신 또한 같은 방법으로 집안의 3대(부모, 자신, 아들)의 가족들이 처형당했다.

부녀자들인 모친, 처, 제수, 며느리들도 모두 대역죄인의 가족 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가 되거나 관비가 되어 끌려가고 말았다. 온 집안이 멸문의 화를 입을 때 그의 둘째아들인 박순(筍)의 아내(성주이씨)는 친정이 대구의 하빈 이었다. 그래서 친정이 가까운 대구(닭발골)로 와서 관비로 있던 중 유복자를 낳게 됨에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몰수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해산을 하니 아들이었고 이때 우연히도 같은 날 부인의 여종이 딸을 낳았다. 그래서 이들은 아기를 두아기를 모두 살리기 위하여 서로 바꾸어 기름으로서 아이들의 목숨을 보존하였다.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진 이 아이가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 관찰사(정2품, 현도지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렀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만 살 수 있느냐? 자수하여 떳떳하게 살도록 하라"며 한양으로 갈 것을 권유 하였는데, 이때는 임금이 바뀌어 성종이 왕으로 있었다.

조정에서도 사육신들에 대해 옳은 일을 했다는 여론이 일고 있어서 서울로 올라간 박비는 성종임금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충신의 자손이라 칭찬하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위로하며 성종은 사육신중 오직 하나 남은 핏줄이라 박비의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이라 고치고 사복시정(司僕侍正:궁중의 가마와 마필, 목장을 맡은 책임자)의 벼슬도 내렸다. 박일산은 성종10년(1479년) 묘골로 돌아왔고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종택(宗宅)을 짓고 정착하였으며, 이 사람이 바로 사육신 여섯 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으로 묘골 순천 박씨 입항조가 된다.

그 후손들이 절의묘(節義廟)라는 사당을 세우고 할아버지 박팽년의 절의를 우러르며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충정공 취금헌 선생만이 후손에 의해서 배향되어 오다가 어느 날 선생의 현손인 계창(繼昌)공이 선생의 제삿날에 여섯 어른(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게 되고 이후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다시 제사를 지냈고, 그 후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양했는데, 조선 고종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서원과 함께 훼철되었다. 그 후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사육신을 이곳에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忠孝)위인 유적 정화사업"에 따라 정면 5칸, 다포식 겹처마 팔짝 지붕의 육신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외삼문(外三門), 삼충각, 숭절당, 관리사, 담장 등을 갖추었다.

 

▩산의 개념도

 

 

▩나의 산행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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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

모처럼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날씨가 상쾌하여 기분이 좋아 발걸음이 가볍다.

문양역에 내려 간단히 산행준비를 하고 굴다리를 지나니 우측에 마천산가는 들머리가 나오는데 예전에 없던 대문 비스므리 한 것을 세워 눈길이 간다.

들머리 반대쪽 농로를 따라 가니 이정표가 나오는데 표시대로 가니 들머리가 나온다.

심호흡 한번 하고 등로를 오르는데 5분도 채 안되어 능선길에 접한다.

아침 일찍 올라오니 상큼한 봄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하여 기분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키고 널널한 능선길에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등로 곳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무시하고 송전탑3을 지날 즈음 우측으로 난 녹색길 분기봉이 나와 따라 가는데 조금 내려서니 등로가 숨어버린다.

동물들이 지나다닌 듯한 희미한 길을 따라 한참을 오는데 뱀 한 마리가 지나가 얼마나 놀랐는지 식은땀이 흐른다.

길도 없고 뱀이 자꾸 뇌리에 떠올라 그만 등로 찾기를 포기하고 훤한 무덤으로 내려와 2차선 지방도로를 따라 하빈교를 지나 육신사로 바로 간다.

나는 왜 뱀이 이렇게 무서울까????

이 세상에 뱀과 개를 제외하고는 무서운 게 없는데!!!!

그놈의 뱀과 개만 보면 발이 딱 붙어버린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니 충절문이 우뚝 서 있어 그 속을 지나 육신사가 있는 묘골에 들어서니 동네가 아늑한 게 삼면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한눈에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하나뿐인 목숨을 충절과 바꾼 6명을 모신 육신사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고즈넉한 한옥들이 즐비한 묘골 마을을 돌아보고 다시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녹색길을 이어간다.

안부네거리를 넘어 육각정을 지나 낙빈서원 갈림길에서 낙빈서원으로 내려가는데 대나무들이 무수히 넘어져 있어 각개전투 하듯이 등로를 넘나들어서야 낙빈서원에 발을 디딜 수 있었는데 지척에 있는 삼가헌으로 가는데 이번엔 개들이 무섭게 짖어 댄다.

삼가헌을 뒤로하고 왜관으로 넘어가는 지방도로를 가로질러 안부를 넘어 가는데 개들이 많이 짖어 대 약간은 움츠려든다.

안부를 넘어 논둑길을 지나 왜관-성주간 4차선 도로 지하 통로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매서운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강바람을 맞아가며 능선길을 이어가다 구봉산 전망대에 오니 풍광이 너무 멋져 흔들의자에 앉아 이른 점심을 먹는다.

나지막한 능선길에 오르내림이 크게 없어 한시간정도 지나니 하목정에 도달한다.

하목정을 지나 4대강 자전거길로 이어지는 녹색길을 따라 오다 낙동강 제방위로 이어지는 녹색길을 걷는데 세찬 강바람이 수위를 더 높여 매섭게 몰아친다.

제방위에 설치된 연빛 마을쉼터, 봉촌 나루터전망대, 봉촌 쉼터, 문산 취수장으로 이어지는 녹색길이 세찬 강바람을 맞아가며 가노라니 내 뺨이 감각이 없다.

문산 취수장으로 가는 도중에 말짱하던 하늘에 구멍이 뚫려 비도 뿌려주니 최악의 날을 잡은 것 같다.

문산 취수장 넘어 오는 길에 영벽정으로 가는 길을 내려다보니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영벽정을 지나 또다시 제방길을 한참 걸어와 매곡 취수장을 지나니 물위에 뜬 멋진 자전거길이 이어져 기분이 절로 좋아져 콧노래까지 나온다.

낙동강 물위를 걷는 기분을 한껏 즐기며 한참을 내려오니 대피통로라고 쓰여진 곳에 모암봉의 강정대로 가는 녹색길이 열린다.

강정대로 오르는 오름길을 가는데 ‘어디로 가면 되는냐고??’ 친구 전화가 온다.

또다시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만 후두둑 비가 내리는데 맘이 급해 한달음에 강정대까지 올라와 인증 샷 한 컷하고 사면길을 부리나케 달려가 모암봉 정상가는 갈림길에서 강정보로 가는 내림길을 쉴 사이 없이 내려가니 멀리 강정보가 눈앞에 들어온다.

강정마을 표석앞에 도달하여 사진 한 장 찍고 있으려니 친구전화가 오고 조금 있으니 친구차가 미끄러지듯이 다가온다.

차에 올라앉으니 시원한 음료수와 정성껏 마련한 김밥을 내어 놓는다.

배가 고프던 차에 허겁지겁 먹고 있으니 너무나 행복해진다. 

 

▼   문양역사를 나오면서 입구에 있는 안내도를 한번 쳐다보고 

 

▼ 문양역사도 한번 담아 본다

 

▼  문양역 좌측으로 조금 올라와 지하통로를 지나간다

 

▼  지하통로 우측으로 마천산 들머리가 있고

 

▼ 좌측으로 농로를 따라 올라간다

 

▼ 이정표 표시대로 농로를 따라 가며

 

▼ 가야할 능선을 쳐다본다

 

▼  조금 가다 농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틀어서

 

▼  올라가니 들머리가 나온다

 

▼ 마천산 안내도도 한번 담아보고

 

▼  완만한 오름길을 5분정도 오르니 능선길이 나온다

 

▼  좌측으로 올라왔는데 우측길은 문양역방향인데

 

▼ 널널한 능선길이 걷기에 마냥 좋다

 

▼ 능선길을 조금 오니 길이 끊겨 버렸는데

 

▼ 우측으로 내려오니 새로운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 다시 올라가 능선길을 이어가는데

 

▼ 좌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하나 있다

 

▼  조금 더 진행하니 식당에서 만들어 놓은 듯한 알림판과 길이있는데

 

▼  무시하고 계속 진행한다

 

▼ 송전탑을 지나니

 

▼ 우측으로 난 내림길이 하나 보인다

 

▼  조금 더 진행하니 우측 마천산 가는 길과 좌측 녹색길이 갈라진다

 

▼  좌측 무명봉에 오르니 쉼터가 있는데 물한모그 마시고 내려서는데

 

▼ 널널한 등로가 갑자기 숨어버린다

 

▼  무작정 치고 내려오니 오솔길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 다시 등로는 없어지고 인근 밭으로 내려선다

 

▼  새로 단장한 감문가 앞을 막고 있어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데

 

▼ 잡목가지를 치고 나아가

 

▼ 잡초사이로 내려선다

 

▼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하빈교를 지나

 

▼ 하빈 배수장을 지나 사리능선으로 가려다

그놈의 뱀이 생각나 안전한 포장도로를 따라 간다

 

▼ 수무리가는  방향의 표석도 담고

 

▼ 묘2리 마을도 지난다

 

▼ 삼거리에서 왜관가는 좌측길을 버리고 육신사 가는 우측길로 걸어간다

 

▼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대 승강장에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 육신사 알림판을 한번 읽어본다

 

▼  충절문을 지나

 

▼ 좌측 육신사 방향으로 걸어간다

 

▼ 멀리 육신사 전시관도 보여서

 

▼ 가까이 가 보니 문이 잠겨 있었다

 

▼  묘골 마을 안으로 조금 더 들어오니

삼거리에 녹색길 안내도가 서있고

 

▼  육신사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  이정표도 상세하게 되어 있고

 

  ▼ 바로 지척에 있는 충효당에 가본다

**충효당(忠孝當)

충효당에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여가시간에 충효와 예악(그림,글씨,악기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궁도와 마술 등을 실습시켰으며, 부녀자에게는 내 청사에서 규문 법도와 가정내칙을 가르쳤다.

조상들의 일상생활과 여가생활을 알아보는데 귀중한 자료인 충효당은 인조22년(1644년) 충정공의 7세손으로 금산군수를 지낸 숭고(崇古)공이 별당으로 건립한 것을 그 후 충효당으로 고쳐 불렀다.

1916년에 후손 최동(最東)공이 이를 중수한바 있으나, 백년가까운 세월이 다시 흐르는 동안

잘 돌보지 못하여 무너질 위기에 놓였던 것을 충정공의 후손 우손(禹孫)은 이를 묘골 마을 입구에 다시 옮겨 세웠다.

 

▼  대문앞에 충효당 알림판도 서있고

 

▼ 담장 밖에서 들여다 보니 한폭의 그림을 보는것 같다

 

▼ 쪽문을 들어서니 후손이 살고 있는것같아 더 들어가지 못하고

 

▼  멋진 노송만 한번 쳐다보고

 

▼ 나오니 후문도 멋이 있다

 

▼  충효당을 뒤로하고 조금 더 올라오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좌측은 박두을 여사 생가터로 가는길이고

우측은 육신사 가는 길이다

우선 박두을여사 생가터로 가서 보고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부인인 박두을 여사의 생가터

호암 보다 세살연상의 박두을 여사는 1907년 11월8일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동 산골마을에서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아버지와 어머니 손씨의 4녀로 태어났다.

묘동마을은 순천박씨의 토착촌 이었다. 박팽년의 후손답게 선비였던 아버지 박씨와 '교동댁'으로 불렸던 어머니 손에서 박여사는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적에 얼굴도 곱고 마음씨도 좋아 '두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십 오륙 세 되던 무렵 어느 날, 절에서 시주를 나온 한 스님으로 부터 "처녀는 앞으로 왕비가 아니면 일국의 왕 못지않은 갑부가 될 사람을 만나 그 안방마님이 되겠소"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스님의 예견이 적중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박두을 여사의 생가 터는 현재 마무리 조성 중에 있다.

 

 

▼ 박두을 여사 생가터임을 알리는 알림판도 있고

 

▼ 한옥 두채만 덩그렇게 지어져 있다

 

▼  박두을 여사 생가터 바로 옆에 있는 멋진 한옥도 한번 담고

 

▼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옥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본다

 

▼  마을 한켠에는 현대식 전원주택도 하나 들어서 있고

 

▼ 대문을 열고 들어가봐도 아름다뭄 뿐이다

 

▼ 본채만 한번 담아보고

 

▼ 한옥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담아 본다

 

▼ 돌담도 볼수록 멋을 더하는데

 

▼  육신사로 향하는 길의 돌담이 정겹기만 하다

 

▼ 육신사로 가는 길이 곧게 뻣어져 있고

 

▼  육신사가는 길 옆에 멋진 한옥이 있어 한번 담아보고

 

▼  가까이 가보니 이곳에서도 후손이 살고 있다

 

▼ 갑자기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데

 

▼  육신사 가는 길에 도곡재를 알리는 표석이 있어  

**도곡재

도곡재는 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사용되던 집이다. 처음에는 조선 정조 2년(1778)에 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살림집으로 세운 건물이나, 정조 24년(1800) 경에 도곡 박종우의 공부방으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서 도곡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이며, 후대에 퇴칸을 달고 대청을 넓혀 누(樓)처럼 꾸몄다. 도곡재는 태백산지역 살림집의 일반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박한 건물이다.

 

 

▼  가까이 보니 알림판도 있고

 

▼  대문을 들어서니

 

▼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 지나간 세월로 다시 돌아가고픈 생각에

 

▼  이리저리 돌아다 본다

 

▼ 한옥의 아름다움은 기와집이나 초가집이나 매한가지 인데

 

▼  섬돌의 각선미가 더 좋은것 같다

 

▼ 다락방도 눈에 보이고

 

▼ 초가집도 정겹기만 하다

 

▼  한옥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더 담아보고

 

▼ 육신사로 들어간다

***육신사

처음에는 충정공 취금헌 선생만이 후손에 의해서 배향되어 오다가 어느 날 선생의 현손인 계창(繼昌)공이 선생의 제삿날에 여섯 어른(사육신)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게 되고 이후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다시 제사를 지냈고, 그 후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양했는데, 조선 고종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서원과 함께 훼철되었다. 그 후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다시 사육신을 이곳에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충효(忠孝)위인 유적 정화사업"에 따라 정면 5칸, 다포식 겹처마 팔짝 지붕의 육신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외삼문(外三門), 삼충각, 숭절당, 관리사, 담장 등을 갖추었다.

배향인물

 

1)하위지(河緯地, 1387~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적촌(赤村). 선산 출신. 윤(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지백(之伯)이고, 아버지는 군수 담(澹)이며,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綱地)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또 경상감사에게도 그를 구료하도록 전지(傳旨)를 내렸다. 1444년 집현전부교리가 되어 ≪오례의주 五禮儀註≫의 상정(詳定)에 참여하였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무함을 당해 전라감옥에 갇혀 병이 깊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을 간호하였다. 1448년 집현전교리로 복직된 뒤 이듬 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 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鄭而漢)과 정창손(鄭昌孫)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그 뒤 1453년(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하였다. 그 해 ≪역대병요 歷代兵要≫와 병서(兵書)의 편찬에 참여했던 집현전학사의 품계를 수양대군 (首陽大君)이 앞장서서 올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적의 편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품계를 올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의 품계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였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 데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고, 그리고 종신(宗臣)의 신분으로 사은(私恩)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직제학에 전보되었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경상도 영산(靈山)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1454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佛堂)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해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侍講官)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이듬 해 집현전부제학에서 예조참의로 전임되었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선산에 퇴거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라 그를 간곡히 불러 예조참판에 승진되었으며, 곧 이어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게 되었다. 세조의 즉위 후 그에게 교서를 내리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다.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 왕권강화책의 하나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署事制)를 폐지시키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대해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예(司藝)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국문(鞫問)을 받게 되었다. 국문을 받으면서도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刑 :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을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아직 어린 나이인 작은아들 박도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 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 六臣傳>에서 하위지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평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사 (彰節祠),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박팽년(朴彭年, 1417~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懷德) 출신. 원상(元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생(安生)이고, 아버지는 중림(仲林)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던 휴가 제도)를 하였다.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이름높은 선비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위진 ‧ 남북조시대의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成三問)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쟁(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觀稼 :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 라 하고 상감(上監 :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버지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 :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단종 복위 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 뒤 1758년(영조 34)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러나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 : 가문이 없어짐)이어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글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문집이 전하지 않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는 글만 표석(表石)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그의 절의를 기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회덕박선생유허비 懷德朴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3)이개(李塏, 1417~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제6대왕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색(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종선(種善)이고, 아버지는 계주(季疇)이며, 어머니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文)으로 ≪운회 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했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 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한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상왕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 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 : 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해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홍모(鴻毛 :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현릉(顯陵 : 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라고 했다.

사후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다. 이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까마귀 눈비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단가(短歌)가 있다.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4)성삼문(成三問, 1418~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석용(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달생(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승(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塾)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홍문관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 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 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 洪州成先生遺墟碑>와 <연산성선생유허비 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5)유성원(柳誠源, ?~1456)

 

조선 전기의 문신.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瑯玕). 수(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滸)이고, 아버지는 사인 사근(士根)이며, 어머니는 윤임(尹臨)의 딸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집현전저작랑으로 당시의 의학 총서(醫學叢書)인 ≪의방유취≫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6년 박사로 승진했고, 144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춘추관 사관(史官)의 자격으로 ≪고려사≫의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적에 좌사경(左司經)으로 선발되어,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2년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해 ≪고려사≫를 개찬할 때 여러 사람이 과별로 분담해 찬술하자,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열전을 담당하였다. 이 해 3월에는 춘추관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또, 1453년(단종 1) 지평(持平)이 되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을 때 수종한 사람을 가자하고 세종 때 ≪역대병요 歷代兵要≫와 병서의 찬정(撰定)에 참여한 사람의 가자를 계청(啓請)한 것은, 조신이 종친에게 아부하고 종친이 사은(私恩)을 파는 일이므로 명령을 모두 회수하기를 청해 관철시켰다.

이 해 10월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 등 대신을 살해하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해 정권을 잡은 뒤 백관들을 시켜 자기의 공을 옛날 주나라 주공(周公)에 비견해 임금에게 포상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에 명해 정난녹훈(靖難錄勳)의 교서(敎書)를 기초(起草)하도록 하자 집현전의 학사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나 집현전교리였던 유성원만이 혼자 남아 있다가 협박을 당해 기초를 하고는 집에 돌아와서 통곡했다고 한다. 11월 장령이 되어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책정이 공정하지 못함을 들어 개정을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454년 경복궁 안의 불당을 없앨 것을 소를 올려 주장했으며, 이 해 4월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었고 ≪문종실록≫의 찬술에 참여하였다.

이 해 2월 사헌부에서 자기들의 건의가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령을 사임하자 직집현전(直集賢殿)에 임명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 해 집의도 겸하게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成三問)·박팽년 등 사육신이 주동이 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는데, 그도 이 모의에 참여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성삼문·박팽년 등이 차례로 잡혀와서 모진 고문을 당할 때, 그는 성균관에 있다가 여러 유생들에게서 이 일의 내용을 듣고 관대도 벗지 않고서 패도(佩刀)를 뽑아 자기의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뒤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복위사건의 주동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다.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국가에서 육신의 절의를 공인,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시켰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6)유응부(兪應孚, ?~1456)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成勝 :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別雲劒 : 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公)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정상(情狀)을 신문했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의 <육신전 六臣傳>을 지으면서 단종복위의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로서,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삼주역(三主役)으로 부각시켰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남효온의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그대로 확정되어,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 등 6인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적에도 사육신으로 재차 확정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육신사 정문을 한번 돌아보고  

 

▼  입구에 있는 이정표도 한번 담아본다

 

▼ 육신사 알림판도 한컷 담고

 

▼  알림판 옆에 있는 송덕사(?) 표석도 한번 담는다

 

▼  육신사 들어가니 우측에 멋진 쪽문도 맘에 들고

 

▼ 육신사 사당은 양지 바른 곳에 조용히 모셔져 있었다

 

▼  육신사를 칭송하는 비석 같은데

 

▼ 표석이 많이 서있다

 

▼  박준규의장의 표석도 있고

 

▼ 최규하 대통령의 표석도 있고

 

▼ 박정희 대통령의 표석도 있다

 

▼  육신사 좌측에 또다른 표석이 있고

 

▼ 사당 입구에 성인문이라 쓰여 있는데???

 

 ▼ 잔디와 한옥이 한데 어울려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  우물이 하나 있어 가까이 가보니

 

▼  박준규의장의 생가터란다

 

▼ 육신사 좌측 계단에 올라서니 사당이 한폭의 그림같아 보인다

 

▼  정문 앞쪽을 봐도 멋이 있고

 

▼ 잔디 깔린 정원도 아름답다

 

▼ 육신사 우측에 있는 태고정에 가보니

**태고정(太古亭)

취금헌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세운 태고정은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부르며 655평의 터에 자리 잡아 건물2동(30평)이 보존되어있다.

이 정자가 원래 서있던 건물의 위치를 보면 정자의 북편에 사육신의 절의묘가 있고 남서쪽에는 흥(興)자 모양의 99칸 종택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홍전문과 이문이 있어 절도사이하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말에서 내렸다고한다.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사우(사당)와 태고정 일부만 남기고 다타버렸으며, 선조29년 총관공 충후공이 다시 세웠으며 임진왜란 중에 왜병이 육신사의 사당 서북쪽의 기둥을 도끼로 찍으니 기둥은 상하지 않고 자기발만 찍혔다고 하며 또, 사우와 태고정에 불을 지를 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치고 많은 비가 쏟아져 저절로 불이 꺼졌다고 전한다. 왜병들이 그 신기함에 몹시 두려워할 때 총관공의 아우 충서(판관공)공이 왜병을 격퇴 시켰다.

그러나 충후공의 두 딸은 왜병에 쫓겨 구봉산 탁대위에서 낙동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그후에 체찰사가 육신사의도끼 자국과 불난 흔적을 보고 시를 읊어 정각에 걸었다

『 난 후에 인가는 백에 하나도 남기 어려운데

 

오직 육선생 사당만은 산기슭에 우뚝 서 있네

 

선생들의 충절은 신명이 감동하여 하늘도 도와주시니

 

오랑캐의 불길이 어찌 혼령을 놀라게 하리.』

 

선조31년(1598년) 12월 27일

 

▼  알림판도 있고

 

▼  태고정의 현판도 볼수 있다

 

▼  오래된 태고정 한옥도 한번 담고

 

▼ 태고정 현판도 한번 담아본다

 

▼ 육신사 우측 빈터를 지나 오솔길을 올라오니

안부네거리에 이정표가 서있다  

 

▼ 우측은 육신사에서 올라오는 길이고

좌측은 도재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 이정표도 상세하게 가르켜 주고 있고

 

▼  조금 걸어 오니 육각정에 이정표가 서있다

 

▼ 육각정도 한번 담아보고 능선길을 이어가니

 

▼ 낙빈서원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 낙빈서원 가는 길에 울창한 대나무숲이 우선 맘에 드는데

 

▼ 좌측은 가지런히 정비해 놓았지만

 

▼  우측길은 대나무가 넘어진게 있는가 하고 생각했더니만

 

▼ 완전히 길을 막아버린다

 

▼ 낮은 포복자세로 각개전투 하듯이 대나무를 넘어와

 

▼ 낙빈서원으로 간다

**낙빈서원

하빈면 묘리 소재의 낙빈서원은 단종조의 사육신을 모시고 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여 보위에 오르자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은 절개를 지켜 복귀 운동을 도모하던 중 김질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참형과 3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로서 혈손마저 끊어지게 되었다.

이들 육신 중 박팽년의 혈손은 모계의 향리인 하빈에 세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혈손인 박계창 때에 와서 사우를 세우고 박팽년을 향사하였다. 선조 때 계창(繼昌)이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대문 밖에서 사육신이 함께 오위(五位)를 베풀고는 함께 향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성주의 한강 정구가 “오위를 사삿집에서 한꺼번에 향사하는 것은 제례에 맞지 않으니 마땅히 별묘를 세워 향사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 후 1679년(숙종 5)에는 사당을 세워 봉사해 오다가 1691년(숙종 17)에는 강당과 함께 하빈사를 완공하였다. 1694년(숙종 20)에는 ‘낙빈’이라고 사액되었다.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가 1924년에 박씨문중에서 재건을 논의하여 1924년 현재의 위치에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원래의 위치와는 다르고 또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재실형식의 간단한 건물만 세웠다. 1998년 달성군에서 해체복원하였다. 낙빈서원의 사당은 1971년 육선생 초모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국고보조 및 도지사, 군수의 지원으로 1982년 별도의 육신사를 만들어 사육신의 위패를 모셨다. 현재 낙빈서원에서는 향사를 드리지 않고 향사는 육신사에서 지낸다.

 

▼ 입구에 서 있는 알림판도 한컷 하고

 

▼ 전경도 담아 본다

 

▼  아담한 낙빈서원이 풍치를 즐기는듯 한데

 

▼ 현판을 한번 보고 내려간다

 

▼ 낙빈서원을 내려가니 삼가헌이 보이는데

**삼가헌

달성에는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 중 한분인 충정공 박팽년(1417∼1456) 후손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삼가헌은 박씨 집성촌과는 낮은 산을 경계로 하고 있다. 삼가헌은 박팽년의 11대 손인 성수聖洙가 1769년에 이곳에 초가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 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 뒤 그의 둘째 아들 광석光錫이 벼슬을 물러난 후 1826년 초가를 허물고 현재와 같은 정침과 사랑채를 지었다. 별당인 하엽정은 광석의 손자인 규현奎鉉대에 파산서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에 누마루를 달고 연못을 만든 것을 1874년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하였다.

삼가헌三加軒이라는 이름은 중용에서 나왔다. 중용 제 9장에는 子曰 天下國家可均也, 爵祿可辭也, 白刃可蹈也, 中庸不可能也(자왈 천하국가가균야, 작록가사야, 백도가답야, 중요불가능야) 라는 문구가 있다. 이 글은 "천하와 국가는 다스릴 수 있고, 관직과 녹봉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도 있지만 중용은 불가능하다."라는 뜻이다. 이는 천하를 다스림은 知이고, 작록을 거부하는 것은 仁이며. 칼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은 勇에 해당한고 한다. 즉 선비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삼가헌은 별서를 가진 구조이다. 별서를 구성하는 방식은 같은 집안에 있느냐 조금 떨어져 있는가로 구분되며, 연못이 있는가, 아닌가로 나뉜다. 이곳은 본채와 같이 붙어 있으면서 연못을 앞에 두고 있다. 별서의 이름은 하엽정荷葉亭으로서 하荷는 연꽃이라는 뜻이 있다. 즉 하엽정은 “연꽃잎 정자”라는 뜻이다. 하엽정은 연꽃으로 유명한 곳이라 한다. 주손冑孫은 “사진가들의 연꽃을 찍기 위해 많이 찾는다.”고 하였다.

 

▼  삼가헌 알림판도 한번 보고

 

▼  대문안도 한번 들여다 본다

 

▼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해서 그냥 되돌아 나와

 

▼  이정표 표시대로 구봉산 방향으로 길을 간다

 

▼   갈림길에서 우측 공장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좌측 안부로 가는 길을 따라 간다

 

▼  녹색길 안내도도 한번 담고

 

▼  녹색길 이정표도 한번 담아본다

 

▼  고개를 넘어 논밭 길을 건너

 

▼  지방도 지하통로를 지나

 

▼  능선 삼거리에 올라선다

 

▼  낙동강을 끼고 이어진 능선길을 따라 걸어간다

 

▼  체육시설도 지나고

 

▼ 하산리 이정표도 한번 담고

 

▼  숲속길을 이어간다

 

▼  구봉산 전망대에 올라서서 멋진 풍경을 구경하고

 

▼  성주 대교도 한번 담아보고

 

▼  참외 농사가 한창인 비닐하우스도 한번 담아본다

 

▼  전망대에서서 셀프로 한컷 담고

 

▼  멋진 조망을 즐기며 이름 점심을 먹고 앉아서 한컷하고 녹색길을 이어간다

 

▼ 내려오니 멋진 흔들의자도 있고

 

▼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도 한번 담아본다

 

▼ 능선길이 끝나가니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길이 멋진데

 

*하목정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조선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이다. ‘하목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서 잠깐 머물렀던 인조(재위 1623∼1649)가 훗날 낙포의 첫째 아들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준 것이다. 또한 일반 백성들의 주택에는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인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인조가 명령하여 이 집에는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랑채로 이용되었던 이 집은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처마곡선도 부채 모양의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내부에는 김명석·남용익 등 많은 유명인들이 쓴 시가 액자가 걸려있다.

 

▼  하목정으로 들어가 본다

 

▼ 하목정 알림판도 한번 담아보고

 

▼ 전경도 담아본다

문이 굳게 닫혀 있기에

 

▼ 옆으로 들어가 한컷 담아본다

 

▼ 역시 한옥의 아름다움이 멋을 풍기는데

 

▼  하목정 안을 들여다 보고 다시 되돌아 나와

 

▼ 녹색길을 이어간다

멋진 능선길은 어디가고 아스팔트 포장으로 뒤덮힌 자전거길로 이어지네

 

▼ 뒤돌아서서 녹색길 대문도 한번 담고

 

▼ 이정표도 한번 담아본다

 

▼ 성주대교 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로 띠리 기는데

 

▼ 중학생인 듯한 얘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한다

 

▼ 성주대교 밑을 지나

 

▼  성주대교도 한컷 하고

 

▼ 낙동강 제방으로 이어지는 녹색길을 따라 간다

 

▼ 끝없이 이어지는 제방길을 가는데 매서운 강바람이 내 뺨을 할키고 지나간다

 

▼ 강변엔 멋진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 쉼터도 멋지게 실치되어 있다

 

▼ 시멘트 포장으로 뒤덮인 길을 걸으려니 무릎이 아파온다

 

▼ 건너편 성주땅도 담아보고

 

▼ 길을 가는데 무서운 개 한마리가 앞에 서있다

 

▼ 뒤돌아 보기도 하고 한참을 기다려 다시 길을 가는데

 

▼ 하천 관리소 가  나온다

 

▼ 다시 나루터 건너편도 한번 쳐다보고

 

▼  봉촌 나루터 팻말도 한번 담아본다

 

▼ 봉촌 쉼터도 지나고

 

▼ 체육시설도 구경하며 걷다보니

 

▼ 제방길이 끝이 나고 다시 자전거길로 접어든다

 

▼ 배수 펌프장을 지나니

 

▼ 멋진 풍경이 내눈에 들어온다

 

▼ 문산 정수장으로 향하는데

 

▼ 자전거 길옆에 조그마하게 난 길이 녹색길인가 보다????

 

▼ 테크가 설치되어 있어 물위로 걷는 기분은 좋다

 

▼ 잔잔히 흐르는 낙동강물도 음미하고

 

▼ 풍경도 담아본다

 

▼ 한폭의 그림을 보는것 같은 멋진 풍경인데

 

▼ 멋진 쉼터에서 잠시 비를 피하고 물도 한모금 마신다

 

▼  문산 정수장도 한번 담아 보고

 

▼ 취수장도 한번 내려다 본다

 

▼ 녹색길 안내도도 한번 담고

 

▼ 철조망 사이로 길을 이어간다

 

▼ 문산 취수장 고개를 넘어 오니 시골풍경이 너무나 멋이 있는데

 

▼  문산 정수장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 영벽정으로 녹색길은 이어지는데

 

▼ 대교에서 봤던 학생들이 벌써 되돌아 내앞으로 간다

 

▼ 영벽정으로 오니 강정보가 아련히 보이는데

 

**영벽정

영벽정을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양팽손(1488∼1545)과 김종직(1431∼1492)의 시로 미루어 조선 전기 관청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 10년(1632)에 능주목사 정연이 아전들의 휴식처로 고쳐 지었다고 전하며, 고종 9년(1872)에 불타 버린 것을 고종 10년(1873)에 새로 고쳐 지었다. 이후에도 보수를 거듭해 오다가 1920년에는 주민들이 모은 비용으로 손질하여 고쳐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는데 3겹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둥근기둥(두리기둥)을 세워 마루를 깔았고 마루의 사방에는 조각한 난간을 돌려 장식하였다. 정자 안쪽에는 9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연주산의 경치를 비추는 지석강물을 바라볼 수 있다하여 붙인 이름으로, 지석강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 영벽정 입구에 와 알림판도 한컷 하고

 

 

▼ 영벽정 전경을 한번 담아본다

 

▼ 세워서도 한번 담아보고

 

▼ 들어갈려니 문이 굳게 닫혀져 있다

 

▼ 영벽정을 뒤로하고  입구에 나오니 다시 제방으로 녹색길이 이어진다

 

▼ 가마득한 제방길을 걸어

 

▼ 제방 중간에 있는 쉼터도 지나고

 

▼ 사각 정자도 지난다

 

▼ 하천 감시하는 듯한데

 

▼ 취수장 삼거리에 도달한다

 

▼  취수장 안쪽으로 길이 나있어

 

▼ 안으로 걸어 간다

 

▼  예쁜 터널길도 지나고

 

▼ 멋진 자전거 길을 따라 간다

 

▼ 강정보 주탑도 한번 담아보고

 

▼  자전거 길도 한번 담아본다

 

▼ 잔잔한 낙동강이 마치 호수와 같아 보이는데

 

▼ 강정보가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다

 

▼ 낙동강물을 내려다 보니 내 맘이 차분히 가라 앉는다

 

▼ 강정보를 다시 한번 쳐다보고

 

▼ 터널길도 한번 걸어본다

 

▼ 대피통로라는 곳으로 들어가면 녹색길이 이어진다

 

▼ 자전거길을 버리고 내려오니 좌측으로 올라가는 길도 보이고

 

▼ 우측으로 목교를 건너 오름길을 오르면 강정대라는 멋진 전망대가 나온다

 

▼ 녹색길  팻말을 한참만에 볼수 있어 반가움이 앞서고

 

▼ 오름길을 조금 오르니 눈에 익은 녹색길 대문이 보인다

 

▼ 멋진 강정대를 지나

 

▼  사면길을 타고 한참 오니 정상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난 강정보 가는 길로 따라가

 

▼ 강정보 내림길에 계단도 설치되어 있고

 

▼ 마을 끝자락으로 길이 나있다

 

▼ 강정보를 바라보고 길을 이어가

 

▼ 강정마을에서 녹색길 걷기를 마감한다

 

▼ 대실역 가는 길이 아직 남았는데 친구가 태우러 온다기에 기다려

편하게 집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