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송7 2013. 3. 3. 20:22

 

**** 기 행 개 요 ****

*** 기 행 지 : 가창 우록 녹동서원

*** 일 자 : 2013년 03월 03일(일)

*** 후 기 : 산정산 - 우미산 산행을 마치고

 

** 김충선 선생님(1571∼1642)과 우록리**

김충선 (金忠善) 선생은 조선시대 귀화(歸化)한 일본인.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 본성은 사(沙), 본명은 야가(也可).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3000군사를 인솔하고 들어왔다가 조선의 문물을 흠모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항복함

사성(賜姓)받은 김충선(金忠善)계의 김해 김씨와는 그 출계(出系)가 다른 동음 이성(異姓)이다.

그리하여 김수로계를 선김(先金), 김렴계를 후김(後金)이라 불러왔다. 김렴계 시조는 김충선. 일본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스나야가[沙也可(사야가)]이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의 좌선봉장으로 조선 침략에 앞장섰으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악의 풍속에 감탄하여 귀화함

모하당문집 (慕夏堂文集) : 일본의 귀화인인 조선 중기의 문신 김충선(金忠善)의 문집 과 모하당술회 (慕夏堂述懷) :김충선(金忠善)의 가사 총 462구의 장편가사로, 국문학사상 보기 드문 귀화인(歸化人)의 작품이라는 데 의의가 있음

우록은 대구 근교에 있는 마을인데 일본인 사야가 장군이 김충선으로 이름을 바꾼 뒤 정착한 곳이다. 대구 시내에서 204(혹은 439)번 시내버스를 타면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종점에 도달한다. 우록마을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5년 11월 ‘김충선(사야가) 바로 알기 한·일 심포지엄’이 열린 뒤부터였다그러나 일본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해마다 이곳 우록리를 찾는 일본인 관광객 수가 늘어나 지금은 일본어를 구사하는 안내인을 상주시킬 정도다.

삼정산 세 봉우리의 중심점에 그의 묘가 있다.

사야가는 원래 시인이 아니라 장군이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20대의 젊은 나이로 일본군 선봉장으로 조선에 왔다가 침략전쟁을 반대해 조선에 귀화한다.

그 후 조총과 화약 제조기술을 조선에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에서 큰 공을 세워 정이품 벼슬을 받는다. 김충선은 이곳에서 다섯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고 72세로 죽은 뒤 마을 뒷산에 안장된다. 현재 그의 후손 5000여명이 전국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록리에는 지금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400여년을 지켜온 마을인 셈이다

우록마을을 지도에서 보면 왼쪽으로 우미산→통점령→주암산→가창면 소재지, 오른쪽으로 우미산→삼성산→병풍산→용지봉→가창면 소재지로 이어지는데 500∼800m의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우록마을에서 발원하는 물은 가창면 소재지를 지나 대구시를 관통하는 ‘신천’으로 이어진다. 첩첩 산들은 웅장하면서도 후덕하다. 난리를 피해 보신하기에 좋은 승지(勝地)다. 그런 까닭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이 마을은 한 번도 전란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