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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 앨범/ ♣ 대 구 지역

대구 와룡산 산행

 

*****산 행 개 요*****


산  행  지 :  대구 와룡산(299.6m)
▩일       시 :  2009. 03 .12(목)
▩산행 코스 :  선원초교 - 헬기장(와룡산정상,299.6m) - 철탑 - 용머리봉(262.9m) - 철탑 - 헬기장(정상) - 선원초교 
▩산행 거리 : L= 약 4 km
▩산행 시간 : 산행 1시간50분, 간식및휴식  0시간30분, 합이 2시간20분(날씨:포근한 날씨)
▩참  가  비 :나홀로 산행

▩준  비  물 : 간식,식수 다량, 썬그라스, 보온쟈켓,우의,디카, 기타 개인장구.
출  발  지 : 16:20분(선원초교뒤 들머리)
▩산행  종류: 왕복형 산행

산의  개요:

와룡산은 용이 누운 형국이라 와룡산인데 하늘에서 보면 그 용의 누운 자태가 선명하다.
특이한 산세로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나라에는 4개의 와룡산이 있다.

①경남 사천 와룡산 ②충북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의 와룡산 ③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의 와룡산과 함께 ④대구 달서구의 와룡산이다.

이 와룡산들은 모두 명산이어서 등산객이 줄을 잇거나 고대문화유적이 있는 산이다.
대구의 와룡산은 금호강을 바라보고 누운 형상이다.
개구리 소년들은 용의 허리 부분인 불미골로 들어가 등짝인 상리등 새방골 일원에서 발견되었으니 지척간의 거리를 움직인 것이다.
와룡산 일원은 고대유물의 보고이다.

1923년 일본인들이 와룡산에서 달성공원쪽으로 가는 구릉지(지금의 내당동 중리동 비산동 일원)에서 수백 기의 수혈식 석곽묘(냇돌로 깐 덧널묘)를 발견했는데 이 묘제는 가야의 묘제였다.
즉 독립된 가야 나라가 이 와룡산 기슭에 있었다.
그 때 유뮬은 출자형입식 금동관, 금귀걸이, 은제허리띠, 금동신발등장식물과
환두대도, 검과 창등, 미늘쇠와 쇠살촉 등 무기류,
안장가리개, 발걸이 재갈등의 마구류, 등잔울등이었다.
1974년에도 와룡산 기슭에서 많은 유뮬이 쏟아졌는데 청동기와 철기시대초기의 유물로서 동과, 청동재갈 철재갈, 말얼굴가리개와 말방울, 중국거울인 漢境, 모방경등었다.
이들 유물로 보아 부족국가 중심세력은 와룡산에서 시작해 차차

대구시내 지역으로 그 세력을 넓혀간 것이다.
그러면 서라벌 못지 않은 이런 방대하고 우수한 유물을 보여준 고대국가는 어느 나라인가?
추정되는 옛나라로는 탁순국과 성산가야, 대가야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탁순국을 대구로 보는 견해는 최근 창원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면서 좀 들어가 버린 형국이다.
좀 멀지만 고령의 대가야가 이 지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는 하나, 필자는 인근의 성주를 중심으로 한 성산가야가 강대해지면서 이 와룡산 지역을 오랫동안 점령한 것으로 본다.
왜냐면 현재 달성군과 대구의 경계가 금호강이 아니고 와룡산이다. 옛날부터 성산가야의 영향권인 달성군 다사면과 신라권인 대구의 경계가 이렇게 육지에 그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성산가야와 대구분지의 세력(나는 이를 서라벌에서 파견된 신라군주나 성주, 주치州治로 본다)이 화살이 난비하는 격렬한 전투를 오랫동안(수십년 이상) 와룡산에서 펼쳤는데 마침내 성산가야는 신라의 공격로부터 와룡산 지키기에 성공한다.
수많은 가야와 신라의 젊은이들이 피를 뿌린 곳이 와룡산이다.
이 전투의 증거가 바로 와룡산에서 발견되는 화살촉이나 칼, 창, 미늘쇠 등이다. 황산강(낙동강의 옛이름)을 건너기 위해 신라는 약 300년간 가야연맹과 전투를 펼쳤는데 그 주요한 전장은 양산, 다사, 사벌주이다. 다사지역의 주전장은 와룡산으로 성산가야는 대가야와 연합하고, 일본서기에 근거하면 왜도 낙동강을 거슬러 와 가야를 도왔다.
가야의 접전지역인 다사 지역은 오랫동안 신라를 막는 가야세력의 교두보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고

그 요새는 와룡산이었다.
진흥왕때 이르러 대가야가 망하면서 와룡산은 신라영토에 편입되었다.
지금 와룡산이 대구가 아닌 금호강 건너의 달성군 다사면에 속해 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개구리소년이 찾아든 불미골의 원래 이름은 불매골로서, 옛날 쇠를 녹이던 점터, 즉 쇠부리터가 있던 곳이다. 원시 용광로가 있던 야철지로서 농구나 전투무기 생산을 위해 토철을 녹여 쇠를 녹이고 붓던 곳이다.
불매골이 있음은 와룡산 일원이 철산과 연료공급지가 함께 존재하는 쇠벌(서라벌)이었음을 의미한다.
또 금호강으로 연결되는 낙동강 수운은 거대한 부족국가 성산가야의 존재를 가능케 한다.
(나는 이 와룡산의 부족국가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다사국多沙國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옛날의 낙동강은 지금보다 폭이 4배이상 넓었다. 왜군이 선단으로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다. 섬진강 지역을 다사로 보는 것이 정설이지만 왜의 내왕이 훨씬 더 잦았던 강이 낙동강이다.)
천험요지로서 와룡산은 예나 지금이나 격렬한 전적지였기도 하다.

강가에 용소가 있듯 방어지형으로서 유리하여 공격을 잘 막아냈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임진왜란때 지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와룡산의 산 정기를 끊었는데 이는 인물이 많이 배출될 지형이 와룡산임을 그가 안 때문이라고 한다. 산의 맥을 자르니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고 하는데 거두절미하고 이 산이 중요한 산으로 대중들에게 회자되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나라의 영웅 제갈량의 호가 와룡이다.
둔법과 진법에 능한 와룡선생은 일찌기 양자강 가에 무인 둔진을 설치해 무심코 이 진에 들어온 오나라 육손 장군이 빠져 위기를 겪는다.
고대사회에서 용이란 힘과 지략을 음미한다..
지금은 와룡산 중심터가 대구시의 쓰레기매립지가 되어 있다.

용의 뱃속이 쓰레기로 가득차 있는 형국이다.
개구리소년이 와룡산에서 조난당한 것은 와룡이 마침내 노한 때문은 아닐까?
<와룡산의 비밀  이양훈님의 글에서 펌>

▩산행  지도:



▩산행  후기: